조선전기 백정을 보는 시선은 이렇지 않을까. by 앨런비

모든 백정이 강도는 아니지.

근데 강도들을 잡으면 다 백정이야.

모든 백정이 살인범은 아니지.

근데 살인범의 절반은 백정이야. 

모든 백정이 가축도둑놈들은 아냐.

근데 가축훔친 흔적을 조사하면 죄다 백정마을이야.

모든 백정이 방화범은 아니지.

근데 방화범을 잡으면 반은 백정이야. 

모든 백정이 마적은 아니지.

근데 마적단을 잡으면 모두 백정이야. 

(...)


뭐 이런면에선 히닌->부라쿠민으로 이어진 일본보다는 차라리 이해가 되는 것인가 ㄱ-

백정 마적단의 쌩난리는 중종기가 거의 마지막...이지만 임꺽정이 난리 한번 터트리고-_-;

그 다음부터는 강력범죄는 그닥 안하고 그냥 농사짓고 고리만들고 도축도 하고 살아간 듯;


백정의 인구는 일제시대는 약 3만명으로 전 인구중 극히 일부고 버드나무로 가구류 제작하는 고리백정 주축.

조선전기는 10~20만정도가 아닌가 갠적으로 추정.

남원에 2000명이 산다고 하던데, 남원이 대읍이고 북방에 백정이 별로 없는 것을 생각하면 X50~100이 대충 맞지 않을까 싶던.

대백정 군사작전(...) by 앨런비

중종실록 9권, 중종 4년 10월 5일 계사 1번째기사 1509년 명 정덕(正德) 4년 심의의 일과 도적을 잡을 방책에 대해 의논하다


조참(朝參)을 받았다. 조강(朝講)에 나아갔다. 지평(持平) 허지(許遲)가 아뢰기를,

"심의(沈義)가 윤대(輪對)에서 ‘임금은 약하고 신하는 강하다.’[君弱臣强]는 말을 아뢰었기 때문에 아랫사람들이 매우 의구(疑懼)하게 되었습니다. 심의는 심술(心術)이 본래 비뚤어지고 험악하여 취할 것이 없는 사람이지만 육조(六曹)의 낭관(郞官)으로 있었으니, 어찌 사리를 알지 못하고 아뢰었겠습니까? 추고하시기 바랍니다."

하고, 헌납(獻納) 조방언(趙邦彦)은 아뢰기를,

"심의가 윤대에서 한 말은 과연 큰 잘못입니다. 그러나 이미 사람들로 하여금 말을 하게 하였으니, 비록 광패(狂悖)하다 해도 또한 마땅히 우악(優渥)하게 용서하셔야지 죄를 다스릴 수는 없습니다. 지금 만약 죄를 다스린다면 사체(事體)에 해로울까 싶습니다."

하고, 영사(領事) 유순정(柳順汀)은 아뢰기를,

"듣건대, 도적(盜賊)이 날로 심해져 황해도·개성부(開城府) 등지에는 이미 장수를 보내어 잡도록 했습니다. 전에 전임(田霖)이 포도 대장(捕盜大將)이 되어 철저하게 잡아들였으나 그 여당(餘黨)이 아직도 남아 있어 거개 모두 보복(報復)하고 있습니다. 듣건대, 장단(長湍) 사람으로 지휘(指揮)하여 도적을 잡게 한 자가 있었는데 적들이 곧 살해하였고, 또 인천(仁川) 수군(水軍)으로서 전임의 부하가 되어 도적 잡는 일을 지휘하던 자를 도적들이 보복하여 죽이며 말하기를, ‘전임이 이미 죽었는데 네가 인제 누구를 믿으랴?’ 하는 등 참혹함이 이와 같으므로, 비록 민가에 지접(止接)하더라도 감히 발설(發說)하지 못하게 된다 합니다.

인천(仁川)의 재인(才人)과 백정(白丁)들이 있는 소굴(巢窟)에 장수를 보내되, 사냥한다고 핑계하여 사졸들도 알지 못하게 하고 느닷없이 야간(夜間)에 덮친다면 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또 듣건대, 도적들이 승정원(承政院)이나 병조(兵曹) 등의 곳을 날마다 엿보다가 그의 도당에게 급히 보고한다는데 조금이라도 지연되게 되면 비록 장수를 보낸다 하더라도 잡지 못하게 될 것이니, 모름지기 따로 계책을 마련함이 좋겠습니다."

하고, 지사(知事) 권군(權鈞)은 아뢰기를,

"인천만이 아니라 김포(金浦)·통진(通津) 등 지방에도 많이 있어 이리저리 서로 왔다갔다 하니, 만일 동시에 덮친다면 한꺼번에 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전에 전임이 나가 돌아다니며 잡은 뒤에 거의 잠잠했었는데 지금 도로 번성함이 이러하니, 마땅히 신속하게 폐해를 제거해야 하겠습니다."

하고, 조방언은 아뢰기를,

"도적을 잡아 백성들의 피해를 제거해야 됩니다. 그러나 도적이란 빈궁한 데서 일어나게 되는 것인데, 듣건대 민간(民間)이 지극히 빈곤하여 꾸어서 창곡(倉穀)을 상환(償還)한다 합니다.

도적을 없애는 계책은 마땅히 먼저 백성을 구제하는 것에서부터 해야 할 것이니, 포흠(逋欠)한 것을 감해 주는 방도라도 강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그러하다.

도적들이 일어남->백정이겠지->야간에 칩시다!->동시에 칩시다!

....한양 옆에서 군사작전 논의렸다(...)

조선전기 백정 개판기(...) by 앨런비

세종실록 22권, 세종 5년 10월 8일 을묘 8번째기사 1423년 명 영락(永樂) 21년 재인과 화척의 칭호를 백정으로 개명하게 하다
병조에서 계하기를,

"재인과 화척(禾尺)은 본시 양인으로서, 업이 천하고 칭호가 특수하여, 백성들이 다 다른 종류의 사람으로 보고 그와 혼인하기를 부끄러워하니, 진실로 불쌍하고 민망합니다. 비옵건대, 칭호를 백정(白丁)이라고 고쳐서 평민과 서로 혼인하고 섞여서 살게 하며, 그 호구를 적에 올리고, 경작하지 않는 밭과 묵은 땅을 많이 점령한 사람의 밭을 나누어 주어서 농사를 본업으로 하게 하고, 사냥하는 부역과 버들그릇[柳器]과 피물(皮物)과 말갈기와 말총, 힘줄[筋]과 뿔 등의 공물을 면제하여 그 생활을 안접하게 하고, 그 가계가 풍족하고 무재가 있는 자는 시위패(侍衛牌)로 삼고, 그 다음은 수성군(守城軍)을 삼으며, 그 가운데에도 무재가 특이한 자는 도절제사로 하여금 재능을 시험하여 본조에 통보하여 다시 시험케 한 후 갑사직(甲士職)에 서용하고, 만약 그대로 옛 업을 가지고서 농상(農桑)에 종사하지 않고 이리저리 유이하는 자는 법률에 의하여 죄를 논단하고, 인하여 호적을 상고하여 즉시 본거지로 돌아가게 하며, 그 가운데 사가의 노비로 있는 자는 본주(本主)의 의견을 들어 처리하도록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백정개판 The Begins(...)



세종실록 40권, 세종 10년 윤4월 3일 갑신 3번째기사 1428년 명 선덕(善德) 3년 황해도 감사가 강음현에서 도적질하는 신백정들의 물리칠 방도를 아뢰다국역원문 . 원본 보기
황해도 감사가 계하기를,

"강음현(江陰縣) 천신사(天神寺)의 탑재[塔峴]에 신백정(新白丁) 20여 명이 있는데, 〈말을 타고〉 불을 지르며 도둑질을 하므로, 고을 수령이 군사를 거느리고 추적하여 잡으러 가서 적(賊)과 만났는데, 남녀 10인이 다 활과 화살을 차고 있었으며, 극력으로 활을 쏘며 항거하였습니다. 도적의 남자 1명을 쏘아 죽이고, 또 남녀 7인을 사로 잡았는데, 그 중 한 여자는 남자의 옷차림을 하고 있었습니다. 남자 2인은 개성(開城)의 왕흥산(王興山)을 향하여 도주하므로, 따라갔으나 잡지 못하였습니다. 또 평산(平山)의 원적동(元積洞) 산봉우리에 말탄 도적 8인이 있었는데, 다 활과 화살을 차고 있으며, 햇불 한 개를 들면, 배천(白川)의 호국산(護國山) 동쪽 봉우리에서 또한 횃불 한 개를 들어 서로 호응하고 있습니다. 도적을 만날 때마다 추격하면 다 개성을 향하여 달아납니다. 이것은 반드시 개성에 사는 백정(白丁)과 재인(才人)들일 것입니다. 도적의 무리가 활을 쏘며 항거하기 때문에 생포하기는 어럽습니다. 만약 항거하는 자가 있으면, 청컨대 모두 쏘아서 포획(捕獲)하게 하고, 또 개성에 사는 신백정과 재인들은 모두 다른 전례에 따라 평민들과 섞여 살게 하여, 그 당(黨)을 해산하게 하소서."

하니, 병조에 내리도록 명하였다.



황해도에서 여자까지 말타고 활쏴서 강도짓하는 백정무리 토벌(...)


세종실록 42권, 세종 10년 10월 28일 병오 4번째기사 1428년 명 선덕(善德) 3년 황해도의 강도들에 대해서 치죄하도록 하다
형조에서 계하기를,

"황해도의 강도 신백정(新白丁) 강두언(姜豆彦)·홍득희(洪得希)·홍상좌(洪上左)·홍석이(洪石伊)는 율에 의하여 참형(斬刑)에 처하여야 하옵고, 김만(金萬)은 비록 그들과 더불어 도둑질하지는 않았사오나 그 정실을 알고도 재물을 나누어 받았으니, 청컨대 아울러 참형에 처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르게 하고, 김만은 한 등을 감하였다.



황해도 강도짓은 당연히 백정.


세종실록 58권, 세종 14년 10월 12일 정유 4번째기사 1432년 명 선덕(宣德) 7년 예조에서 신백정의 자제들로 독서를 원하는 자는 향학에 나아가게 할 것을 아뢰다
예조에서 아뢰기를,

"신백정(新白丁)들은 이미 평민들과 섞여 살고 서로 혼인하게 되어 군역(軍役)을 차정(差定)하였사오니, 그들의 자제들이 독서를 원하는 자에게는 향학(鄕學)에 나아가게 하옵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섞어 버리자. 교육도 시켜야지 암.



세종실록 58권, 세종 14년 10월 13일 무술 2번째기사 1432년 명 선덕(宣德) 7년 형조에서 박충보와 박소을진의 죄가 교형에 해당함을 아뢰다
형조에서 아뢰기를,

"배천(白川)의 죄수 선군(船軍) 박충보(朴忠寶)는 그의 아내를 질투하여 죽였삽고, 평산(平山) 죄수 백정 박소을진(朴所乙進)은 백정 유성기(柳成己)와 싸움하다가 죽였사오니, 율(律)이 교형(絞刑)에 해당합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서로 쳐죽임. 형법상 너 사형.



세종실록 49권, 세종 12년 9월 11일 기유 6번째기사 1430년 명 선덕(宣德) 5년 형조에서 살인죄를 범한 명막동 등의 교형을 건의하다국역원문 . 원본 보기
형조에서 아뢰기를,

"영유(永柔)에 수감되어 있는 사노(私奴) 두란(豆難)은 신백정(新白丁) 이원길(李元吉)을 살해하였고, 봉산(鳳山)에 수감되어 있는 나장(螺匠) 명막동(明莫同)은 백성 한인기(韓仁己)와 싸우다가 살해하였으며, 강진(康津)에 수감되어 있는 선군(船軍) 백인달(白仁達)은 선군(船軍) 박의(朴義)와 서로 싸우다가 이를 살해하였으니, 모두 율문에 의해 교형(絞刑)에 처하여야 마땅합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백정과 양민이 서로 죽이노라. 법적으로 너 사형.




세종실록 69권, 세종 17년 8월 3일 임인 3번째기사 1435년 명 선덕(宣德) 10년 강도질한 신백정 3명을 참형에 처하다국역원문 . 원본 보기
형조에서 아뢰기를,

"강도질한 신백정(新白丁) 이파회(李波回)·송천수(宋天守)·송타일(宋他日) 등은 형률에 의거하면 참형(斬刑)에 처해야 되겠습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강도니까 너 사형.


세종실록 34권, 세종 8년 12월 15일 갑술 5번째기사 1426년 명 선덕(宣德) 1년 살인한 백정 김조을도는 연로한 아비 봉양을 위해 벌을 한 등 감하게 하다국역원문 . 원본 보기
형조에서 계하기를,

"황해도 송화(松禾)에 사는 백정(白丁) 김조을도(金照乙都)가 싸우다가 김영생(金永生)을 죽였사오니, 법에도 죄는 교형(絞刑)에 해당하오나, 그 아비가 나이 70이고 다른 자녀가 없사오니, ‘부모를 봉양할 사람은 남겨 두라. ’는 글이 있습니다."

하니, 명하여 한 등을 감하게 하였다.



살인죄지만 그래도 애비 불쌍해서 봐준다.




세종실록 69권, 세종 17년 8월 27일 병인 1번째기사 1435년 명 선덕(宣德) 10년 병조에 재인과 화척의 관리를 상고하여 아뢰게 하다국역원문 . 원본 보기
병조에 전지하기를,

"대신(大臣)이 의견을 올리되, ‘속전(續典)에 재인(才人)과 화척(禾尺)을 백정(白丁)으로 고쳐 일컫게 하고, 토지를 적당히 주도록 하여 한결같이 평민의 호적 등록에 의거하게 하였으나, 그들 중에 농업을 일삼지 아니하고 이곳 저곳으로 떠돌아 옮기는 사람은 이를 죄주도록 했으니, 원컨대, 거듭 밝혀서 효유하고 엄격히 금지하도록 하며, 만약 고치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모두 찾아내어 그 처자들과 아울러 여연(閭延) 등처로 옮겨 들이어 변경을 충실하게 하는 것이 실로 좋은 법이 될 것입니다.’ 하니, 그것이 편리한가 편리하지 않은가를 서로 의논하여 아뢰라."

하였다.



씨발 답 없어요 미치겠어요. 걍 말 안듣는 애들 북방에 쳐박으면 안될까요?



세종실록 78권, 세종 19년 7월 28일 병진 4번째기사 1437년 명 정통(正統) 2년 각 고을 수령으로 하여금 신백정을 구처하는 데 힘쓰게 하다국역원문 . 원본 보기
의정부에서 아뢰기를,

"삼가 《원육전(元六典)》과 《속육전(續六典)》에, 신백정(新白丁)을 구처(區處)하는 법(法)을 보니 지극히 자세하게 되어 있습니다. 각 고을 수령들이 예사 글로만 보고 흐리멍덩하게 살펴보지 못하며 감사도 역시 살펴서 행하지 못하여, 이로 인해서 혹은 이리저리 유이(流移)하기도 하고, 혹은 떼를 지어서 도둑이 되기도 하여 옛 습속을 고치지 못하는 자가 종종 있습니다. 비옵건대, 각도의 수령으로 하여금 그 경내에 있는 신백정을 추쇄(推刷)하여 각 동리에 나누어 배치하고, 적당하게 토지를 주고 항산(恒産)이 있는 자를 골라서 보수(保授)088) 하게 하되, 그 동리의 이름·인구 및 보수자(保授者)를 기록해 두고 매달마다 돌아다니면서 규찰(糾察)하여, 매년 연말에 감사에게 사유를 갖추어 보고하고 호조에 전보(轉報)하도록 하여, 차례로 엄중하게 고핵(考覈)을 더하게 하소서. 수령 가운데 만일에 붙여 살도 록 하는 데 마음을 쓰지 않아 유망(流亡)하게 하는 자가 있으면 모두 죄를 다스리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관리좀 제대로 해라 마.



세종실록 78권, 세종 19년 9월 12일 기해 4번째기사 1437년 명 정통(正統) 2년 곡정 죄수 가구지를 참형에 처하게 하다국역원문 . 원본 보기
형조에서 아뢰기를,

"곡성(谷城) 죄수 사노(私奴) 가구지(加仇之)가 백정 김구지(金仇知)를 죽였으니, 양민과 천인이 서로 구타한 율에 의하여 참형에 해당합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노비가 백정 죽이니 법대로 사형.




세종실록 84권, 세종 21년 2월 16일 을축 2번째기사 1439년 명 정통(正統) 4년 전 이조판서 박신이 신백정들이 농사를 실지로 하는가를 전최할 것을 아뢰다국역원문 . 원본 보기
처음에 전 이조 판서 박신(朴信)이 상언(上言)하기를,

"우리 국가에서는 신백정(新白丁)이 없는 곳이 없사와 소를 잡는 것으로 농사를 대신하여 빈들빈들 놀고 먹는 까닭으로, 개국 이래로 여러 번 조령(條令)을 내려 소 잡는 것을 금하고 농사를 지어먹게 하였사오나, 그들의 습속이 농사를 괴롭게 여기어 말하기를, ‘농사는 본래 하지 않던 일이니, 어찌 쉽게 배울 수 있는가.’ 하고, 소 잡는 것이 여전하와 개전(改悛)함이 있지 아니하니, 국가에도 이익이 없고 생민에게 해독이 심하옵니다. 이제부터는 10년을 한하여 신백정(新白丁)이 농사를 실지로 하는가 아니하는가를 전최(殿最)한다면, 수령들이 다 마음을 다하여 권면하게 되어 마침내는 반드시 성과가 있을 것이옵니다."

하므로, 의정부에 내려 이를 의논하게 하니, 의정부에서 아뢰기를,

"이 말이 매우 사의에 합당합니다. 조장(條章)을 역력히 상고하오면 신백정은 식구를 계산해 토지를 주고, 향리에 녹적(錄籍)을 주어 평민과 섞여 살면서 서로 혼인하게 하였사옵고, 거지를 가탁(假托)하고 떼지어 도적질하는 자는 모두 그들의 말을 빼앗고 억지로 팔게 하여 도적질하는 계획을 끊어 버렸사오니, 그 입법한 것이 상세하여 빠짐이 없었사온데, 각 고을 수령들은 깊으신 뜻을 본받지 아니하고, 다 봉행하지 못하였습니다. 청하건대, 지금부터는 수령이 봉행하지 못한 자는 율(律)에 의하여 처벌하옵고, 또 상언(上言)에 의하여 그 백정들이 생업에 안심하고 농사를 힘쓰는지의 여부를 상고하여 전최하는 데 빙거가 되게 하옵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씨발 농사좀 쳐 하라고. 소고기 고마 쳐먹고. 벌써 10년이다.



세종실록 97권, 세종 24년 8월 6일 계사 5번째기사 1442년 명 정통(正統) 7년 각도 관찰사와 개성부 유수로 하여금 백정의 잡역 상황을 보고하게 전지하다국역원문 . 원본 보기
각도 관찰사와 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에게 전지하기를,

"재인(才人)이나 화척(禾尺) 등이 외딴 곳에 모여 살면서 농업(農業)을 하지 않고 오로지 유기(柳器)나 피물(皮物) 등으로 생업(生業)을 삼고 있으므로, 일찍이 백정(白丁)이라고 고쳐 부르게 하고 전지(田地)를 주어서 평민들과 섞여 살면서 서로 혼인하게 한 법이 《육전(六典)》에 실려 있는데, 지금 들으니, 관리와 인민들이 신백정(新白丁)이라고 부르면서 평민들과 비교하여 차별을 두며, 그곳 수령들이 사냥 등 여러가지 일에 부리고, 유기(柳器)를 공공연히 거두어 가는 일까지 있다고 하니, 그들에게 시키는 잡역(雜役)의 상황을 갖추 기록하여 계문(啓聞)하라."

고 하였다.



고마 좀 차별하고 부려먹으라고. 조사 좀 똑바로.



세종실록 98권, 세종 24년 11월 30일 병술 4번째기사 1442년 명 정통(正統) 7년 함길도 북청 죄수 강구지와 충청도 충주 죄수 오을미를 참형에 처하다국역원문 . 원본 보기
형조에서 아뢰기를,

"함길도 북청(北靑)의 죄수인 강도(强盜) 강구지(姜仇知)와 충청도 충주(忠州)의 죄수인 백정(白丁) 오을미(吾乙未)가 사람을 죽였으니, 청하옵건대, 모두 율(律)에 의거하여 참형(斬刑)에 처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법대로 살인죄는 사형.


세종실록 116권, 세종 29년 4월 29일 경신 1번째기사 1447년 명 정통(正統) 12년 도망간 강도를 잡도록 도운 백정 박두란에게 자급을 더하여 벼슬을 주었다국역원문 . 원본 보기
의금부(義禁府)에 가두었던 평양 강도(强盜) 미륵(彌勒)이 도망하여 고양현(高陽縣) 여석(礪石)에 이른 것을 어떤 길가던 사람이 보았는데, 때마침 황해도 신천(信川) 사람 양소(楊蘇)가 감사의 계본(啓本)058) 을 가지고 역말을 타고 서울로 오는지라, 그 사람이 저의 차고 있던 활과 살을 소(蘇)에게 주면서 붙잡도록 지시하여 다시 옥에 가두었다. 임금이 그 사람에게 상을 주려고 유서(諭書)를 내려 물색하여 찾으니, 재령(載寧) 백정(白丁) 박두란(朴豆蘭)인지라, 자급(資級)을 더하여 벼슬을 주었다.


오 장하다 강도를 잡다니 너 벼슬^^



세종실록 120권, 세종 30년 4월 9일 갑자 2번째기사 1448년 명 정통(正統) 13년 백정에 대한 대책을 논한 전 동지돈녕부사의 조뇌의 상서국역원문 . 원본 보기
전 동지돈녕부사 조뇌(趙賚)가 상서(上書)하기를,

"신은 재능도 없으면서 그릇 성은(聖恩)을 입어 벼슬이 2품에 이르렀으나, 을묘년에 병으로 해골을 빌어 양주(楊州)에 물러와 쉰 지가 지금 14년이 되었습니다. 특별히 복호(復戶)하게 하여 한 집안이 베개를 편안히 하오니, 성은(聖恩)이 더욱 깊사온데 다시 무엇을 근심하겠습니까. 다만 근년에 도적이 흥행(興行)하여 촌락을 표략(剽掠)하여, 보고 듣는 것이 사린(四隣) 안에서 혹은 집이 소실(燒失)되고 혹은 칼과 몽둥이를 맞아서 부모 처자가 쓰러져 피를 흘리오니, 보는 자가 콧날이 시끈하여 아프고 애석하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사온데, 어찌 노신(老臣)이 사는 한 마을뿐이겠습니까. 8도가 모두 그러한데 여항(閭巷)의 작은 백성들이 이 때문에 가산을 잃은 자가 헤아릴 수가 없으니, 이것이 참으로 국가에서 깊이 염려할 바입니다. 그러므로 제지하고 금하는 방법을 쓰지 않은 것이 없으나, 강도·절도가 더욱 심한 것은 어찌 그 이유가 없겠습니까. 노신이 오래 민간에 있어서 고루 보고 들어서 그런 이유를 잘 아옵니다.

대개 성군 작당하여 강포(强暴)가 더욱 심한 자는 모두가 무뢰배들입니다. 우선 노신(老臣)이 살고 있는 한 마을로 보더라도 금년 정월·2월 사이에 사람의 집을 불사른 것이 넷이고, 노상에서 강탈하여 사람을 상한 것이 셋이고, 우마와 가산을 도둑맞은 것은 이루 기록할 수가 없는데, 모두 어떤 사람의 한 짓인지 알지 못합니다. 다만 형적이 나타난 것으로 말한다면 전 군사(郡事) 윤신발(尹臣發)이 말도둑을 잡았사온데, 바로 재백정(才白丁)이었고, 또 마을 사람 부부가 강도에게 해를 당하였는데, 이웃과 동네에서 잡고 보니 바로 화백정(禾白丁)이었습니다. 신의 집에서 두어 달 동안에 우마를 도둑맞은 것이 네 차례이온데, 추적하여 재백정이 모여 사는 마을에 이르렀으나, 즉시 포착하지 못하였으므로 감히 말을 못하였습니다. 이것으로 강도·절도를 더욱 심히 하는 자가 모두 이 무리들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대개 이 무리들은 본래 전토와 집이 없어서 농상(農桑)을 일삼지 않고 항상 개걸(丐乞)하는 것으로 생활을 이어 기한(飢寒)이 절박하므로, 작게는 담구멍을 뚫어 밤에 도둑질하고 크게는 사람을 죽이고 집에 불을 질러서 못하는 짓이 없습니다. 갑진년에 신백정(新白丁)이라 고쳐 이름하여, 전토를 주고 군적(軍籍)에 넣어서 평민과 서로 혼인하게 하여 생업을 편안히 하게 하였사오나, 입법한 이후로 평민이 백정과 혼인하고, 백정이 평민에게 시집가서 밭일을 하고 농사에 힘쓴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대개 평민들은 종류가 다른 것을 싫어하여 혼가를 하려고 하지 않고, 수령들도 여사(餘事)로 보아서 전토와 집을 주지 않으니, 저들이 비록 도둑질을 하지 않으려고 하여도 않을 수 있겠습니까. 경중과 외방의 강도·절도는 이 무리가 반이 넘음이 옳으옵니다.

신은 생각하옵건대 이 법을 거듭 밝히어 남녀 노소를 모조리 호적에 붙이게 하되 저희들끼리 혼가하는 것을 금하고, 평민과 공사 천인(公私賤人)을 물론하고 강제로 혼가하게 하고, 어기는 자는 통렬히 법으로 다스리고, 중년 늙은이와 이미 혼가를 이룬 자는 관가에서 노는 밭을 주어 업을 편안히 하게 하고, 이렇게 하여도 오히려 놀면서 악을 자행하는 자는 신설한 변진(邊鎭)에 귀양보내어 영구히 수졸(水卒)에 편입하소서. 만일 혹시 도망하여 흩어지거든 군법(軍法)으로 논하여 그 나머지를 징계하소서."

하였다.


저쉐키들 소와 말 맹날 훔치고 강도짓하고 무서워서 미칠 것 같아요 ㅜㅜ 

농사 지으라니 말도 안들어요 ㅜㅜ 

평민도 백정도 지네 서로 싫어해서 결혼하라는데 안해요 ㅜㅜ

강력범죄도 과반수는 쟈들이 저지른거에요 ㅜㅜ

그러니 걍 쟈들끼리 결혼하는거 아예 금지시켜버리죠? 고마 좀 쳐 놀게 하고.



문종실록 7권, 문종 1년 4월 19일 정해 8번째기사 1451년 명 경태(景泰) 2년 군사와 양색 백정을 징집하여 사냥하는 것을 엄하게 금하도록 하다국역원문 . 원본 보기
병조(兵曹)에서 아뢰기를,

"각도(各道)의 도절제사, 각진(各鎭)의 첨절제사(僉節制使), 수령(守令) 등이 군사와 양색 백정(兩色白丁)429) 을 많이 징집하여 사냥하니, 청컨대 《육전(六典)》에 의하여 거듭 밝혀서 엄하게 금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백정 사냥동원 좀 작작해라 마. 어차피 계속 하겠지만.



문종실록 10권, 문종 1년 10월 17일 임오 1번째기사 1451년 명 경태(景泰) 2년 좌참찬 안숭선이 의금부의 낭청 1, 2원으로 하여금 도적을 잡는 일을 전담케 하기를 청하다국역원문 . 원본 보기
정사(政事)를 보았다. 좌참찬(左參贊) 안숭선(安崇善)이 아뢰기를,

"지금 도하(都下)1443) 에 도둑이 날로 성(盛)하여 밤마다 사람과 물건을 표략(剽掠)하니, 진실로 염려됩니다. 청컨대 의금부의 낭청(郞廳) 1, 2원(員)으로 하여금 오로지 도적만을 잡게 하고, 엄하게 그 법을 세워 그 근원을 근절하게 하소서."

하니, 형조 참판(刑曹參判) 안완경(安完慶)이 또 아뢰기를,

"각도(各道)의 죄수의 무리 안에는 강도와 살인을 도모한 자가 3백 80여 명이나 되는데, 재인(才人)1444) 과 신백정(新白丁)1445) 이 절반을 차지합니다. 도내(都內)에 붙어사는 곳을 수색하여 체포하고 엄하게 다스리지만, 그러나 형벌이 엄하지 않으면 어떻게 그들을 제재하겠습니까? 육형(肉刑)1446) 은 3대(三代)1447) 에서도 쓰던 바이니, 청컨대 도둑에게 월족(刖足)1448) 의 형벌을 시행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도하(都下)의 도둑은 오히려 쉽게 제재할 수 있지만 육형(肉刑)은 경솔하게 쓸 수 없다. 다시 도적을 잡는 법을 엄하게 하여도 오히려 금단(禁斷)하지 못하게 된 뒤에 월형(刖刑)을 사용하여도 무슨 어려움이 있겠느냐?"

하였다. 



강도 살인이 380명인데 재인과 신백정이 절반 이상임요 ㅜ




세조실록 5권, 세조 2년 8월 12일 기유 3번째기사 1456년 명 경태(景泰) 7년 의금부에서 관군에게 발사 항거한 백정 김생석 등에 대해 치죄를 청하다국역원문 . 원본 보기
의금부(義禁府)에서 아뢰기를,

"백정(白丁) 쇠날이[金生]·돌석이[石乙石] 등이 고달사(高達寺)에 모여 술을 마시다가 관군(官軍)이 쫓아 잡으매 발사(發射)하여 항거하였으니, 죄가 응당 베어야 하며 처자(妻子)는 종을 삼고 재산은 관(官)에 몰수하여야 합니다."

하니, 명하기를 처자는 좌죄(坐罪)하지 말고, 나머지는 아울러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백정애들이 관군이 쫓으니 활쏘면서 개겼어요 ㅜㅜ



세조실록 11권, 세조 4년 2월 8일 정유 3번째기사 1458년 명 천순(天順) 2년 의금부에 백정으로 하여금 우마를 밀도살한 광주 초평리의 김광수를 국문케 하다국역원문 . 원본 보기
의금부에 전지하기를,

"갑사(甲士) 김광수(金光守)가 몰래 백정(白丁)을 불러다가 우마(牛馬)를 도살(屠殺)하였는데, 나타난 장물의 증거도 있으니, 김광수와 인근의 백정들을 국문(鞫問)하라."

하였다. 김광수는 광주(廣州) 초평리(草坪里)에 사는데, 영천부원군(鈐川府院君) 윤사로(尹師路)가 본디 비호하는 자이므로, 임금이 조석문(曹錫文)에게 이르기를,

"김광수(金光守)는 영천(鈴川)045) 의 세도를 빙자하여 향곡(鄕曲)046) 에서 무단(武斷)하였는데, 이제 체포당하였으니 또한 필시 영천에게 애소(哀訴)할 것이다. 모름지기 끝까지 신문(訊問)하는 것이 마땅하다. 유독 이뿐만 아니라, 재상(宰相)의 전장(田莊) 노복(奴僕)도 방자하고 포악하니, 내수사(內需司)의 종[奴]같은 것에 이르러서도 또한 반드시 이와 같을 것이다."

하였다.



백정애들 소와 말 잡지 말라고 했는데 또 잡았음다 ㅜㅜ



세조실록 16권, 세조 5년 4월 22일 계유 4번째기사 1459년 명 천순(天順) 3년 병조에서 군역이 없는 재인과 화척의 취재를 허락할 것을 청하다국역원문 . 원본 보기
병조(兵曹)에서 아뢰기를,

"재인(才人)243) 과 화척(禾尺)244) 으로 그전에 수성군(守城軍)과 시위패(侍衛牌)에 소속된 자는 이미 시험을 보아 갑사(甲士)에 충보(充補)하도록 하였는데, 그들 중에 군역(軍役)이 없는 자는 취재(取材)245) 를 허가하지 아니했습니다. 이 무리들은 다른 평민(平民)들의 예(例)가 아니니, 비록 군역(軍役)이 없는 자일지라도, 청컨대 모두 취재(取才)를 허가하여 벼슬길에 통하도록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야들도 갑사에 충원하졈?




세조실록 30권, 세조 9년 5월 8일 병신 3번째기사 1463년 명 천순(天順) 7년 한성부에 본향에서 도망하여 경중에서 도적이 되는 재인·백정을 추쇄토록 하다국역원문 . 원본 보기
한성부(漢城府)에 전지하기를,

"재인(才人)·백정(白丁) 등이 많이 본향(本鄕)을 도리(逃離)하여 경중(京中)에 와 붙어서 도적(盜賊)이 점점 성하니, 그것을 속히 추쇄(推刷)하라."

하였다.



백정애들이 ㅌㅌㅌ하고 도적질 중인데 쳐잡으삼




세조실록 46권, 세조 14년 4월 2일 신묘 2번째기사 1468년 명 성화(成化) 4년 문과를 경회루 못가에서 시행하고 서현정에 나가 무거를 친히 보다국역원문 . 원본 보기
문과(文科)를 경회루(慶會樓) 못가에서 시험하였는데, 책문(策問)에 이르기를,

"도(道)는 오르고 내림이 있고 정사는 풍속을 개혁함에 말미암으니, 예로부터 다스리는 임금의 원(願)은 교화가 융성하고 은혜 입히는 것을 아름답게 하려고 하지 않은 이가 없었으나, 항상 인심(人心)이 점점 박(薄)하고 풍속이 날로 병들으니 그 까닭은 무엇인가? 도적의 근원은 모두 빈궁(貧窮)한 데서 일어난다고 하나, 지금의 도적질을 하는 자는 모두 호한(豪悍)한 무리를 거느려, 그 사이에 재인(才人)과 백정(白丁)은 10에 8, 9가 되니, 비록 평민(平民)과 섞이어 살더라도 오히려 교화가 따르지 못하였다. 수백 년 이래에 스스로 한 풍속을 이루어 뿌리를 다 제거할 수가 없었으니, 제거하지 않으면 도적이 끊이지 않는데 장차 무슨 방법으로 처리 하겠는가? 또 형벌로써 간사함을 깨우치고 포악함을 제거하여 반드시 다 다스리려 하면, 관리(官吏)가 형벌을 남용(濫用)하는 폐단이 있으며, 엄하게 고신(栲訊)하지 않으면 간사하고 포악한 것이 허물을 굴복할 리가 없으니, 형벌을 남용하지 않게 하고 실정을 반드시 나타내려는 것도 또한 무슨 방법으로 이루겠는가? 백성의 고소(告訴)를 듣고 그 원통함을 펴서 문득 하정(下情)을 상달(上達)하게 하려 하나, 고발하고 들춰내는 것이 풍속이 되니, 비록 자기의 원통함이 간여되지 않았더라도 부민(部民)이 수령(守令)을 고소하고, 서리(胥吏)가 관리(官吏)를 고발한다. 이를 금하려고 하면 언로(言路)가 막히어 원통하고 억울함을 펼 수가 없고, 다 들어주면 상하(上下)가 서로 업신여기어서 풍속이 날로 무너지니, 장차 어떻게 처리하여야 좋겠는가? 이 세 가지는 모두 당세의 급무(急務)인데, 옛것을 상고하여도 또한 모두 있고 자대부(子大夫)의 강론(講論)함에도 자세하니, 옛일을 이끌어서 현금(現今)을 증명하여 다 진술하고 숨김이 없게 하라."

하고, 서현정(序賢亭)에 나아가 무거(武擧)를 친시(親試)하였다.




도적중 백정과 재인은 10에 8~9는 되는데 이거 어이 처리할지 과거 엘리트들아 니가 함 말해봐 ㅜㅜ




세조실록 47권, 세조 14년 8월 14일 신축 1번째기사 1468년 명 성화(成化) 4년 구종직, 안효례, 최호원이 선에 대해 격렬히 논란하다

안효례가 최호원과 더불어 각각 시비(是非)를 고집(固執)하여 서로 논란하였는데, 최호원이 안효례에게 말하기를,

"너는 백정(白丁)의 손자이다."

하니, 안효례가 이르기를,

"과연 내가 백정의 손자라고 한다면 너는 곧 나의 아들이다."

하였다. 말하는 바가 모두 이런 종류였으며 성난 목소리로 서로 욕하면서도 외기(畏忌)하는 바가 없었으므로, 대사헌(大司憲) 양성지(梁誠之)가 임금의 앞에 나아가 안효례의 불공(不恭)한 죄를 탄핵하기를 청하니



백정은 이미 욕이 되버림.



예종실록 3권, 예종 1년 1월 17일 임신 3번째기사 1469년 명 성화(成化) 5년 한봉련이 양주와 부평의 도적떼들을 잡아 오니 붙잡힌 도적들을 국문하게 하다국역원문 . 원본 보기
겸사복(兼司僕) 한봉련(韓奉連)이 양주(楊州)와 부평(富平)에서 도적들이 떼를 지어 공공연하게 겁탈과 노략질을 자행한다고 고하고, 이를 잡기를 청하여, 임금이 한봉련과 내금위(內禁衛) 이덕산(李德山)·권지(權旨) 등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이들을 잡게 하였더니, 백정(白丁) 최해(崔海) 등 9인과 장물(贓物)을 압수하여 가지고 와서 아뢰었으므로, 임금이 명하여 형조(刑曹)에 내려 국문(鞫問)하게 하였다.


도적 잡으니 야들도 백정.



성종실록 6권, 성종 1년 6월 6일 계축 7번째기사 1470년 명 성화(成化) 6년 형조에서 남편을 죽인 감물과 강도질한 막동의 죄를 아뢰니 사형을 내리다국역원문 . 원본 보기
형조(刑曹)에서 삼복(三覆)468) 하여 아뢰기를,

"황주(黃州)의 죄수인 백정(白丁)의 딸 감물(甘勿)이 물고(物故)469) 한 간부(奸夫)인 중[僧] 신일(信一)과 더불어 모의하여 본남편 한득미(韓得美)를 죽인 죄는 율(律)이 능지 처사(凌遲處死)에 해당하고, 전옥(典獄)의 죄수(罪囚)인 백정(白丁) 막동(莫同)이 물고(物故)한 김막동(金莫同)과 더불어 행인(行人)을 위협하여 강도질한 죄는 율(律)이 참부대시(斬不待時)470) 에 해당합니다."

하니 모두 그대로 따랐다.


백정의 딸이 남편 살해니 너 법대로 사형



성종실록 6권, 성종 1년 6월 7일 갑인 3번째기사 1470년 명 성화(成化) 6년 형조에서 살인 강도한 손금동·손금생·모구지산민 등의 죄를 아뢰니 참형을 내리다국역원문 . 원본 보기
형조(刑曹)에서 삼복(三覆)하여 아뢰기를,

"능성(綾城)의 죄수인 백정 손금동(孫今同)·모구지(毛仇知)·산민(山敏)·모을호리(毛乙乎里)·양계순(梁季順)·손금생(孫今生)이 장영기(張永奇)의 당류(黨類)가 되어, 집에 불을 지르고 사람을 죽이고 강도질한 죄는 율(律)이 참부대시(斬不待時)에 해당합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이미 범죄자인 백정이 방화놀이 하니 너 사형



성종실록 6권, 성종 1년 7월 5일 신사 5번째기사 1470년 명 성화(成化) 6년 형조에서 김적·이검달·최원·변종선 등의 강도질한 죄를 아뢰니 참형을 내리다국역원문 . 원본 보기
형조(刑曹)에서 삼복(三覆)하여 아뢰기를,

"신녕(新寧)의 죄수인 사노(私奴) 김적(金迪)과 옥산(玉山)의 양인(良人) 이검달(李檢達)이 정효안(丁孝安)의 집을 겁략(劫掠)하여 강도질한 죄와, 성주(星州)의 죄수인 사노(私奴) 최원(崔元)과 양인(良人) 변종선(卞宗善)과 백정(白丁) 석을만(石乙萬)이 유곡사(楡谷寺)의 중[僧]을 겁략하여 강도질한 죄는 그 율(律)이 참부대시(斬不待時)에 해당합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노비하고 백정이 강도하니 법대로 너 사형


성종실록 6권, 성종 1년 7월 14일 경인 7번째기사 1470년 명 성화(成化) 6년 형조에서 소배산·대배산·자근석이가 강도질 한 죄를 아뢰니 참형을 내리다국역원문 . 원본 보기
형조(刑曹)에서 삼복(三覆)하여 아뢰기를,

"남원(南原)의 죄수인 백정(白丁) 소배산(小裵山)·대배산(大裵山)·자근석이(者斤石伊)가 서원(書員) 황치명(黃致明)의 집을 위협하여 강도질한 죄는, 율(律)이 참부대시(斬不待時)에 해당합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죄수인 백정이 또 강도질하니 너 사형



성종실록 9권, 성종 2년 2월 11일 갑인 4번째기사 1471년 명 성화(成化) 7년 형조에서 장인 금음산을 찔러 죽인 백정 북간의 죄를 아뢰다국역원문 . 원본 보기
형조(刑曹)에서 삼복(三覆)하여 아뢰기를,

"만경(萬頃)의 죄수인 백정(白丁) 북간(北間)이 그 장인 금음산(今音山)을 찔러 죽인 죄는 율(律)이 참대시(斬待時)에 해당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죄수인 백정이 장인어른을 죽이니 너 법대로 사형



성종실록 13권, 성종 2년 11월 15일 계축 2번째기사 1471년 명 성화(成化) 7년 정인지·강희맹이 도성 부근의 도적을 색출하여 치죄하기를 청하다국역원문 . 원본 보기
경연(經筵)에 나아갔다. 강(講)하기를 마치자, 영사 정인지(鄭麟趾)가 아뢰기를,

"근자에 듣자오니, 성저(城底)799) 에서 도적(盜賊)이 떼를 지어 겁략(劫掠)을 공공연히 행한다 하는데, 연곡(輦轂)800) 이 있는 아래에서도 오히려 이와 같거든, 하물며 먼 지방이겠습니까? 신의 뜻으로 생각하건대, 도적의 무리는 먼 데로부터 온 것이 아니고 모두 도성 가까이 있는 것으로 여겨지니, 청컨대 수색하여 잡아다 통렬히 치죄하게 하소서."

하고, 지사(知事) 강희맹(姜希孟)이 아뢰기를,

"신이 일찍이 형조 판서(刑曹判書)를 지냈으므로, 도적의 정상을 갖추 알고 있습니다. 도적이 된 자는 거의가 재인(才人)·백정(白丁)이었습니다. 그 무리[黨]에서 승정원(承政院)의 조례(皂隷)801) 되기를 원한 자가 있었는데, 도적을 잡는 일만 있으면 그것을 먼저 스스로 알고, 경성(京城)에서 군색하게 쫓기면 외방(外方)으로 달아나고 외방에서 군색하게 쫓기면 경성으로 들어와 사람에게 비록 물색하게 하더라도 그 수혐(讎嫌)을 두려워하여 감히 가리켜 고발하지 못하였으니, 청컨대 의심할 만한 곳은 다 색출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도적(盜賊)도 또한 나의 적자(赤子)802) 이다. 얼마나 기한(飢寒)에 핍박하였으면 그랬겠느냐?"

하였다. 강희맹이 말하기를,

"도적은 결코 다시 양민(良民)이 되지 못하오니, 마땅히 중법[重典]으로서 그치게 하소서."

하였다.



이번에 강도도 또 백정이고 어차피 답없으니 죽이졈?

아 걍 봐줘라 마.




성종실록 32권, 성종 4년 7월 26일 을묘 4번째기사 1473년 명 성화(成化) 9년 형조에서 관악산의 도적과, 전의감의 면포를 훔친 자를 처벌할 것을 청하다국역원문 . 원본 보기
형조(刑曹)에서 삼복(三覆)하여 아뢰기를,

"수원(水原)의 죄수인 백정(白丁) 이물재(李勿才)와 이지리(李之里)가 관악산(冠岳山)에 둔취(屯聚)하여 관병(官兵)과 맞서서 대적(對敵)한 죄는, 율(律)이 참부대시(斬不待時)에 해당하며, 전옥(典獄)의 죄수인 종[奴] 승수(升守)가 종[奴] 신생(申生)·장명(長命)·수명(守命)과 더불어 전의감(典醫監)의 면포(綿布)를 도둑질한 죄는, 수교(受敎)에 의하여 승수(升守)는 교대시(絞待時)에 처하여야 합니다."

하니 아울러 그대로 따랐다.


범죄자 백정이 관군과 싸우니 너 사형



종실록 32권, 성종 4년 7월 28일 정사 3번째기사 1473년 명 성화(成化) 9년 형조에서 목장의 말을 도둑질한 백정 김중·내은산·개질지의 죄를 아뢰다국역원문 . 원본 보기
형조(刑曹)에서 삼복(三覆)하여 아뢰기를,

"전옥(典獄)의 죄수인 백정(白丁) 김중(金仲)이 내은산(內隱山)·개질지(介叱知)와 더불어 목장(牧場)의 말[馬]을 도둑질한 죄는, 수교(受敎)에 의하여 수괴(首魁)인 자는 교대시(絞待時)에 처해야 합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목장의 말을 훔친 백정들 처벌



성종실록 35권, 성종 4년 10월 17일 을해 3번째기사 1473년 명 성화(成化) 9년 의금부에서 득산·금원·감정이 김처중의 집을 불사르고 강도질한 죄를 아뢰다국역원문 . 원본 보기
의금부(義禁府)에서 삼복(三覆)하여 계달하기를,

"백정(白丁) 득산(得山)·금원(金元)·감정(甘丁)이 김처중(金處中)의 집을 불지르고 김처중을 쏘아 죽인 강도죄(强盜罪)는, 율(律)이 참부대시(斬不待時)에 해당하고, 수교(受敎)에 의하여 처자는 변방 고을의 노비로 붙이도록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백정이 방화 강도짓하니 사형 및 가족은 노비로



성종실록 54권, 성종 6년 4월 12일 경인 2번째기사 1475년 명 성화(成化) 11년 병조에서 재인과 백정을 양민화 시키는 대책을 아뢰다국역원문 . 원본 보기
병조(兵曹)에서 전라도 관찰사(全羅道觀察使)의 계본(啓本)에 의거하여 아뢰기를,

"재인(才人)360) ·백정(白丁)361) 들은 농업과 양잠을 일삼지 않고 사냥과 장사를 업(業)으로 하여 사방으로 떠돌아다니면서 그 호구책을 얻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을 하루 아침에 모두 군대[卒伍]에 예속시키고 부역(賦役)을 편호(編戶)와 같게 한다면, 그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모여서 도적이 됨으로써 오히려 양민(良民)을 해치게 되지 않을까 우려됩니다. 청컨대 살림이 조금 넉넉하여 군오(軍伍)에 편입되고자 하는 자는 이를 허락해 주고, 산업(産業)이 없는 자는 부역(賦役)을 정하지 말고 한전(閑田)을 지급하여 농상(農桑)을 권장하여 수십년을 기다려서 부실(富實)하게 된 다음에 부역을 정하도록 하소서. 또 앞으로는 재인(才人)·백정(白丁)이라 부르지 말게 하고, 일반 백성과 섞여 살면서 서로 혼인하게 하고, 관찰사(觀察使)로 하여금 그들에게 지급한 전토(田土)의 수를 기록하여 아뢰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아 씨바 저 백정놈들 답없는데 걍 군바리로 만들고 섞어버리죠?



성종실록 69권, 성종 7년 7월 18일 기미 3번째기사 1476년 명 성화(成化) 12년 제도 관찰사에게 하서하여 재인과 백정들을 엄하게 규찰할 것을 명하다국역원문 . 원본 보기
제도(諸道)의 관찰사(觀察使)에게 하서(下書)하기를,

"재인(才人)과 백정(白丁)은 본디 모두 이류(異類)인데, 농업은 일삼지 않고 사람이 살지 않는 곳에 모여서 오로지 도둑질만 일삼으니, 이러한 조짐을 키워서는 안될 것이다. 이미 그들을 민간에 분산시켜 섞여 살게 한 것은 그들의 간교한 술책을 방지하여 점차로 양민(良民)이 되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수령(守令)들을 관찰하여 보면 태만하게 검찰하지 않아서 산행(山行)을 칭탁하여 방종한 행동을 거리낌 없이 하므로 양민들이 피해를 당하니, 이것은 작은 일이 아니다. 경(卿)은 잘 알아서 엄하게 규찰(糾察)을 가하여 전철(前轍)을 밟지 않도록 하라. 만일 혹시라도 위반함이 있으면 수령뿐만이 아니라 경도 또한 책임을 면하지는 못할 것이다."

하였다.



백정들 존나 강도짓 하는 쉐키인거 아는데 씨발 그래도 양민으로 쳐만들라고.

감시 똑바로 하라고 했지? 



성종실록 232권, 성종 20년 9월 26일 신사 2번째기사 1489년 명 홍치(弘治) 2년 병조 판서 정괄 등이 강무 때 포도장을 증원할 것과 재인이 백정들과 섞여 살지 못하게 할 것 등을 청하다국역원문 . 원본 보기
형조 판서(刑曹判書) 정괄(鄭佸) 등이 와서 아뢰기를,

"근자에 도하(都下)에 도적의 무리들이 마구 일어나 다니는데, 만약에 강무(講武) 때에 성중(城中)의 정부(丁夫)들이 모두 종군(從軍)하고, 포도장(捕盜將) 또한 모두 호종(扈從)하면, 신 등은 아마도 도적들이 빈틈을 타서 가만히 일어날까 염려되오니, 청컨대 포도장을 더 정하소서. 또 듣건대, 황해도(黃海道)에 적당(賊黨)들이 백주(白晝)에 무리를 이루어 겁략(劫掠)을 자행하고 간혹 각(角)을 불며 다니기까지 한다 하니, 그 기세가 심히 성합니다. 청컨대 추적하여 잡게 하소서. 또 재인(才人)과 백정(白丁)들이 도하(都下)에서 나그네로 우거[旅寓]하다가 그대로 머물러 사는 자가 제법 많이 있는데, 재인과 백정들은 거의 모두가 도적이므로, 구별(區別)하여 두지 않으면 아니됩니다. 청컨대 원거지(元居地)로 쇄환(刷還)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재인과 백정들은 경도(京都)에 섞여 살 수 없음이 이미 법(法)에 있으니, 그것을 조사하여 아뢰고, 포도장(捕盜將)은 병조(兵曹)로 하여금 의논하여 아뢰도록 하고, 황해도의 도적을 잡는 일은 감사(監司)에게 또한 유시(諭示)하라."

하였다.



백정은 한양에 못살게 이미 했고 튄놈들 잡아!

특히 황해도에서 백주대낮에 강도짓하는 쉐키들은 조져!



성종실록 252권, 성종 22년 4월 23일 무진 4번째기사 1491년 명 홍치(弘治) 4년 재인과 백정의 군정 보충을 청한 행 첨지중추부사 김영유의 상언서국역원문 . 원본 보기
행 첨지중추부사(行僉知中樞府事) 김영유(金永濡)가 상언(上言)하기를,

"지난번에 북쪽 오랑캐가 변방을 침범하여 변장(邊將)을 죽이고 경비하던 군졸을 사로잡아 덕화[聲敎]가 미치지 않는 국경 밖으로 도망갔으니, 마땅히 죄를 신문하는 군대를 일으켜야 할 것입니다. 당당(堂堂)하고 융성한 조정에서 군사가 많지 않은 것도 아니며 날래지 않은 것도 아닌데 오히려 빠뜨려진 인재나 숨겨진 인재가 있을까 염려하시어 제색 군사(諸色軍士) 및 사대부(士大夫)의 첩(妾)의 자식도 직접 임석하시어 재주를 시험하셨으니, 그 군사 선택을 위한 지혜에 빠뜨려진 계책(計策)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신의 어리석은 여러 가지 생각 중에 취할 만한 것이 간혹 있을 것이라고 여겨 신총(宸聰)364) 을 함부로 욕되게 합니다. 우리 나라의 재인(才人)과 백정(白丁)은 그 선조가 오랑캐의 종족(種族)입니다. 그래서 비단 말을 잘 타거나 활을 잘 쏠 뿐만 아니라 천성이 모두 사납고 용맹스러워 걸어다니면서 짐승을 잡는 데 익숙하여 〈그것을〉 예사로 여기며, 험한 곳을 넘나드는 것을 마치 평지를 다니는 것처럼 하여 주리고 추위에 떨어도 괴롭게 여기지 않으며, 바쁘게 다녀도 고달프게 여기지 않습니다. 만약 그들을 내보내어 선봉(先鋒)으로 삼는다면 한 사람이 1백 명을 당해낼 수 있을 것입니다. 늘 군사를 징발하면서도 내버려 두고 논하지 않으시니, 신은 저윽이 결점이 있는 일이라고 여깁니다.

삼가 원하건대, 조관(朝官)을 나누어 파견하셔서 모두 자세하게 추쇄(推刷)하여 재주를 따라 등급을 나누고 성명(姓名)을 장부에 기록하여 군정(軍丁)으로 보충하도록 허락하소서. 다만 이 무리들은 병적(兵籍)에 붙여 있지 않아 본래 보정(保丁)이 없으니, 무기와 의복과 양식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절목(節目)을 대신(大臣)으로 하여금 의논하게 하고 계품(啓稟)하여 시행하도록 하신다면 군사를 징발하는 데 있어서 틀림없이 조그마한 보탬이 아닐 것입니다. 신이 선왕(先王)을 섬겨 대대로 국가의 은혜를 받았는데 견마지치(犬馬之齒)365) 가 이미 늙었습니다. 이번 북정(北征)에 모책(謀策)은 부족하지만 저(箸)를 빌려366) 감히 구구(區區)한 마음을 간(諫)합니다."

하였는데, 그대로 따랐다.



백정은 걍 오랑캐 족속이라 말타고 활을 잘 쏘고 산을 잘 타니 이번 원정시 군바리로 쓰졈?






....다 긁어오기에는 너무 껀수가 넘쳐나서 일부만 발췌한거임. 

기사를 보면 알겠지만 재인과 백정무리라고 있는데 사실상 재인도 신백정으로 봐도 무방함.


........그리고 씨바 저쉐키들 죽이면 편하겠지만 그럴 수는 없고 교화하자 마 라는 식의 늬앙스가 자주 등장하게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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