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미친 저축량. by 앨런비

기사 풀로 긁으면 너무 지저분해지니 발췌 복붙.


1. 경상도 여러 고을의 회계(會計)한 곡식이 미두(未豆)·잡곡(雜穀) 아울러서 1백 65만 6천 8백여 석(碩)인데, 또 연전(年前)에 우도(右道)의 군수(軍需)가 부족함으로 인하여 해마다 전세(田稅) 5천 1백여 석을 〈서울로〉 상납하는 것을 면제하여 주창(州倉)을 보충하게 하였으므로, 수년(數年) 후면 보충된 것이 반드시 많을 것이니, 다시 의논할 필요가 없습니다."


경상도 165만석 비축.


호조(戶曹)에서 아뢰기를,

"전자에 환미(換米)의 법(法)을 세웠는데, 평안도(平安道)는 3만 1백 석(石)이고 함길도(咸吉道)는 12만 3천 9백 석(石)입니다. 지금 경중(京中)의 장사아치[商賈]들이 가진 양에 따라 고을에 바치면 그 고을에서 첩(牒)을 지급하는데, 충청도(忠淸道)·전라도(全羅道)·경상도(慶尙道) 여러 고을에서 첩(牒)에 의거하여 준급(准給)350) 합니다. 지금 바꾼 쌀과 콩을 계산하면, 평안도(平安道)가 쌀이 1만 4천 9백 80석(石)이고, 함길도(咸吉道)는 쌀이 3만 8천 2백 석(石)인데, 아울러 군자창(軍資倉)·의창(義倉)의 쌀과 콩을 계산하면, 평안도(平安道)가 78만 3천 9백 80석(石)이고 함길도(咸吉道)가 42만 1천 8백 17석(石)이니, 군수(軍需)와 민간의 식량이 넉넉하지 않은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환미(換米)의 법(法)이 시행된 지 3년이지만 그 효과가 이것에 그치고, 또 수령의 척간(擲姦)351) 으로 인하여 민간의 폐단이 작지 않습니다. 그 쌀과 콩이 이미 준비되어 있는 사람은 다시 7월 그믐까지 기한하여 납입(納入)하기를 끝마치게 하되, 기한까지 미치치 못하는 자는 청컨대 모두 정파(停罷)하도록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평안도 78만석, 함경도 42만석 비축.


"전자(前者)에는 군자창(軍資倉)의 저축된 양곡이 1백만여 석이었는데, 지금은 겨우 50만 석인데다가 일찍이 백성에게 흩어준 곡식이 거의 2만 5천 석이나 되고 남아 있는 것은 거의 다 진부(陳腐)한 것이어서 국용(國用)에 적합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묵은 것을 사용하고 새 것을 저축하는 것이 국가의 본의(本意)입니다.


군자창이 고작(?) 50만석. 군자창은 사실상 경창중 하나.


온성(穩城)에서는 1만 3천여 섬[石]을 땅에 쌓아 둔 지 이미 50여 년이 되어, 비록 개나 말까지도 먹지 않는다고 합니다. 신이 생각하기에는 이 곡식은 비록 비축해 둔다 하여도 쓰는데 유익함이 없을 듯합니다. 청컨대 해마다 민간에 흩어 주고, 그 반액만 징납하게 하소서."


육진에 한 진인 온성에서 13000석이 50년간 쌓여서 아예 썩어버릴 정도.


....대략 15~16세기 조선의 저축은 식량기준 500-600만석인듯.


그리고 조선은 1800년경이 되면 환곡등으로 비축 1000만석에 육박.


아무리봐도 조선정부의 제1목적은 닥치고 식량을 비축해서 기근을 구제하는 것 맞는듯-_-;


아 참고로 조선에서 비축 문제로 수시로 나온 말


나라에 9년의 축적(蓄積)이 없는 것을 부족(不足)이라 하고, 6년의 축적이 없는 것을 급(急)이라 하고, 3년의 축적이 없는 것을 나라 구실을 못하는 나라라고 하였으며, 3년 동안 경작(耕作)하면 반드시 1년의 식량을 저축할 수 있고, 9년 동안 경작하면 반드시 3년의 식량을 저축할 수 있다.


....3년 저축 타령 정말 지긋지긋하게 나오고 진지하게 노린 목표 맞는듯;;;



이걸 군비로 쓴다면 어느정도인가 하니.

정군만으로 된 럭셔리 군대로 하면 10만이 1년동안 활동시 72만석.

글고 보인이 합세해서 짐꾼까지 한 일반군대 10만이 1년동안 활동시 48만석.

제승방략 기준 북방정군은 1명이 3되를 먹고 약 6000칼로리 정도로 미친 식사량.





PS.사실 저축 그 자체보다 저렇게 비축하고 모자라다고 정부에서 아우성인 것을 보고 벙찌는게 문제(...) 글고 관료 녹봉 병사 녹봉 없다고 징징징이고(....)

조선초 올량합은 왜 올량합일까? by 앨런비

조선초의 여진은 올량합과 올적합으로 구분됨.

그중 올량합은 건주위 전체고 오도리와 구분도 하지만 대체적인 늬앙스는 올량합에 오도리가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올적합은 화라온올적합=해서여진, 나머지 올적합=야인여진임.

근데 왜 하필 올량합일까.

올량합 발음이야 오랑캐, 우량하이 그정도겠는데.

우량하이 몽골족과 왜 같은지가....-_-

그냥 몰라서라고 하면 편하겠지만,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은 여진사에서 A급 사료에 속함.

그리고 구분도 아주 칼같이 하고, 몽골 올량합 3위도 만날 일이 거의 없어서 그렇지 구분을 함.

그래서 가진 생각.



올량합 여진은 동방삼왕가의 영향이 짙은 애들이 아닐까?




일단 올량합 여진의 출신은 삼성지대로 목단강과 송화강이 합해지는 자무쓰 인근임.

그리고 여기도 동방삼왕가가 중요하게 지배했던 지역.

또한 올량합-오도리의 우두머리중 하나인 동맹가첩목아는 딱 봐도 몽케티무르라는 몽골식 이름이고.

...뭐 그당시 몽골식 이름은 고려인도 다 가지던 것이라지만.

그래도 의심스러운 증거가 또 하나 있으니 동맹가첩목아 동생의 후손인 동청례.

동청례는 조선왕조에서 가장 높이 출세한 외국인으로 꼽히는데, 말이 외국인이지 조선인과 혼혈이라 걍 조선인 취급.

허나 건주여진애들은 동족이라고 대우해주셈여 헤헤 하던 애가 동청례임.

근데 동청례 관련해서 재밌는 기사. 


성종실록 98권, 성종 9년 11월 9일 병인 3번째기사 1478년 명 성화(成化) 14년 예조에 동청례가 집에 소장하던 《몽고세조황제책》 등을 사역원에 보내어 익히게 하다
예조(禮曹)에 전교(傳敎)하기를,

"동청례(童淸禮)가 가장(家藏)했던 《몽고세조황제책(蒙古世祖皇帝冊)》 1, 《지풍우책(知風雨冊)》 1, 《산악보응책(善惡報應冊)》 1, 《남무보대책(南無報大冊)》 1, 《음양점복책(陰陽占卜冊)》 1, 《복덕지혜책(福德智慧冊)》 1, 《음식연향책(飮食燕享冊)》 1, 《일월광명책(日月光明冊)》·《음양택일책(陰陽擇日冊)》 2, 《개천문책(開天文冊)》 1, 《진언책(眞言冊)》 1, 《불경책(佛經冊)》 7, 《예도책(禮度冊)》 1, 《권학책(勸學冊)》 1 등을 사역원(司譯院)에 보내어 전습(傳習)하게 하라.

하였다.


...뭔 추장후손이라지만 책이 왜이리 많노?

물론 책을 좋아하는 여진족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는데.



동청례는 까막눈임



....까막눈이 저런 책을 가진다?

그리고 저 책 목록중에 정말 신기한것


몽고세조황제책


...지금 남아있지 않은 듯 해서 내용은 알 수 없지만 이건 몽골제국에서도 꽤나 높은 자리에서 받을 책 같은데?



여튼 그러한 연휴로 난 이런 추정을 내린 상황.


몽골족의 일파인 올량합, 즉 우량하이족과 조선에서 여진족의 일파를 기록한 올량합, 즉 오랑캐는 뭔가 연관이 있다.

그리고 동청례의 책 소유목록을 보면 그 연관관계가 의외로 크게 의심된다.

몽골족의 후예일수도, 아님 그냥 몽골영향이 강한 여진일 수도 있지만, 여튼 의심이 매우 강하게 된다.


는 결론.





PS.참고로 누르하치 하플로는 몽고계통임;; 칭기즈칸 하플로로 유명했다가, 요즘은 케레이트가 아닌가 보는 그 하플로와 근연관계;

해서여진의 말먹이 방식 by 앨런비

세종실록 84권, 세종 21년 1월 10일 기축 3번째기사 1439년 명 정통(正統) 4년 북평관에서 예조에 야인들의 지리와 혼례풍습, 상례풍습을 보고하다 .

북평관(北平館)에서 예조에 보고하기를,

"홀라온(忽剌溫) 우지합(亐知哈) 올자위(兀者衛) 지휘 첨사 도아야(都兒也)가 말하기를, ‘본위(本衛)의 관하 사람은 3백 60여 호(戶)에 군사 1천여 명이온데, 동쪽으로 3일 노정(路程)을 가면 색할아대산(色割兒大山)이 있고, 북쪽으로 가면 평탄한데 사람이 없고, 서쪽으로 가면 리수(里數)를 알지 못하겠으나 달마아덕처(達麿阿德處)·위타홀론(衛朶忽論) 등의 위(衛)가 있고, 서남간으로 10일 노정을 가면 개원위(開原衛)가 있고, 동남간으로 30일 노정이 되는 곳이 조선국 회령부(會寧府)이다. 대체로 본토의 소산은 노루·사슴이 많고, 곰·호랑이가 그 다음이요, 토표(土豹)·돈피[貂鼠]가 또 그 다음이다. 소와 말은 사철로 항상 초야(草野)에다 놓아먹이되, 오직 타는 말은 꼴과 콩을 먹인다. 만약 꼴과 콩이 결핍되었다면 노루·사슴 고기를 썰은 것과 물고기를 먹인다. 그 혼인하는 예법은 여자가 태어나서 10세 전에 남자의 집에서 약혼(約婚)한다. 약혼한 뒤에는 나이 찰 때까지 세 차례 잔치하고 두 차례에 소와 말 각각 하나를 주고서 나이 17, 8살 되기를 기다려서 혼례를 지낸다. 아비가 죽으면 그 첩에게 장가들고, 형이 죽으면 그 아내에게 장가든다.

우지합(亐知哈)은 부모가 죽으면 그 머리를 땋아 늘이되 끝마다 방울 둘을 다는 것으로 상복을 삼는다. 그 시체는 큰 나무 아래에 놓아두고, 그 아래에 나아가서 말을 잡아 그 고기는 먹고 가죽과 갈기와 꼬리와 다리를 벌려 걸되, 겸하여 생시에 쓰던 활과 살을 둔다. 고기 먹는 것을 꺼리지 아니하며 단 1백 일 안에는 금수의 머리나 눈을 먹지 않는다. 여진인[女直]은 화장(火葬)한다. 가죽 갓[冠]의 꼭대기에는 희고 굵은 베[布]를 엮어 달아서, 앞으로는 얼굴과 눈을 가리고 뒤로는 어깨에 늘어뜨리고 그대로 곧게 내려가는 옷을 입는다. 매양 7, 7되는 날을 만나면 소나 혹 말을 죽여서 고기를 지져서 제사지내고, 거두어서 먹는다. ’고 합니다."

하였다.




....간단요약

말에게 풀을 멕이되, 타는 말은 짚과 콩을 멕임. 

하지만 그것이 없으면

말에게 노루고기 사슴고기 물고기를 멕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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