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말선초 태국과의 접촉에 대한 잡설. by 앨런비


여말선초에 재미있는 사례가 있습니다. 바로 동남아의 사신들이 한국을 방문했다는 것이죠.

보통은 이동네쪽을 잘 모르니 에피소드정도로 언급하고 끝나는 정도인데 이 글에서 좀 더 파고들어서 설명해보겠습니다. 

1391년 고려의 마지막 왕 공양왕이 제위하던 무렵, 갑자기 태국의 사신이 고려에 들어옵니다. 

기록은 이와 같습니다.


暹羅斛 왕국이 내공(奈工) 등 여덟 명을 보내어 토산물을 바치며 서신을 보내어 이르기를, 
“暹羅斛 왕이 이번에 나이 공 등을 사신으로 삼아 배를 감독케 하고 토산 물을 싣게 하여 고려 국왕에게 바치도록 명했습니다.”라고 했다. 
(서신은) 성명이 없고 봉인되어 있지 않으며 단지 작고 둥근 도장이 찍혀 있을 뿐인데, (그 진위를) 조사할 수도 없었다. 나라에서는 그것이 가짜라고 의심하여 이에 의논하기를, 
“(서신을)믿는 것은 불가능하나 또한 믿지 않는 것도 가능치 않다. 내방한 사람은 거절할 수없으니 후하게 그리고 예로써 대우한다. 그러나 그 서신은 받지 않으며, 이로써 (우리가) 미혹되지 않음을 보이는 것이 옳다.”라고 했다. 
왕이 그들을 불러 접견하고 위로했다. 
이때 그들이 왕에게 아뢰기를, 
“戊辰年 즉 1388년에 (저희 나라 왕의) 명령을 받들어 배를 출항하여 일본에 도착해 1년을 그곳에 머물었다가 오늘 귀국에 이른 것입니다. 전하를 뵈올 수 있게 되니 여행의 피로를 잊어버립니다.”라고 했다. 
왕이 그들에게 뱃길로 (그들의 나라에서 고려까지의) 상거를 물으니, 그들이 대답하기를, 
“북풍을 받으면 40일 만에 (이곳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라고 했다. 
그들 중에는 어떤 자는 윗도리를 벗었고, 어떤 자는 신을 신지 않고 있었다. 높은 자는 흰 천으로 머리카락을 감춘다. 종복들은 尊長者를 보면 옷을 벗고 몸을 드러낸다. 세 번을 통역해서야 그 뜻이 전달되었다.


여기서 굵은 표시를 한 부분을 유의해서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일단 처음으로 나타나는 것은 한 나라의 국왕이 보낸 서신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허접하다는 것입니다-_-;

최소한 왕의 이름이든지, 봉인이든지 있어야 할텐데 그런 기본적인 것도 되지 않았다는 것이죠.

그래서 고려는 이게 사기치는 것인지 진짜인지 의문스러워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의문은 너무나도 정당했습니다. 태국의 국서는 전혀 다른 방식이걸랑요-_-;;

태국에서는 조공사나 대등한 국가에 사신을 보낼 때 금을 얇게 펴서 금판을 만든 이후 서신을 금판에 새겨서 보냈습니다. 

그리고 조공을 받을 때는 금으로 꽃을 만들게 해서 그것을 조공의 표시로 받았고요.

...즉 이것은 아무리봐도 중간에서 위조한 국서라는 것이죠.

다만 이들이 그렇다고 국제사기단이라고만은 하기 힘듭니다.

마지막에 강조한 부분을 보면 이들은 확실히 남방에서 온 티가 납니다.

중국인등이 사기를 친 것이라고만 보기에는 통역부터 헐떡대며 삼단통역을 했고-_-;;

그리고 사신단을 이끈 사람이 내공(奈工)이라고 있는데, 내는 여기서 나이라고 읽을 수 있고, 나이는 태국의 한 관직의 이름이었고요.

또한 당시 태국, 즉 아유타야에서는 왕실무역을 했습니다.

왕실이 전쟁비용등을 벌기 위해 왕실에서 상인을 보내서 무역을 하는 형태였죠.

그럼 대충 답이 나옵니다. 

이들은 왕실무역으로 일본까지 헐떡대며 온 것으로 보입니다.

고려까지 오는데 2년이라는 시간은 너무 기니, 아마도 중간에 헐떡대며 무역을 하면서 왔겠죠.

그러다 일본에 오니 옆에 고려라는 나라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을 이끈 내공이라는 사람은 자신의 권한, 또는 독단으로 고려라는 나라가 어딘가 알아보자 하고 고려로 향한 것이겠죠.

그래도 국서가 없으면 뭐하니, 독단으로 쓸 수 있는 정도로 썼거나, 아니면 국서위조를 해서 새로 만든 것일테고요.

이들은 뻔히 태국의 국서가 뭔지 알고 있었을테고, 만약 고려인이 진짜 사신을 보내면 자기들은 사 to the 망이 분명했을테니.

국서위조도 적절한 정도로 했을 가능성도 있었을테고요.

뭐 이렇게 왔지만 고려는 사신을 보내고 자시고 할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그 다음해에 조선이 건국한다는 것으로 게임 셋이죠.

그래서 이들 사신단은 다시 돌아갔습니다. 

이들이 왜구로 사망했을지 무사히 돌아갔을지는 모르겠지만 어이하든 고려라는 나라에 대한 정보를 알려줬을 가능성은 높습니다.

이제 조선이 건국하고 이성계가 태조로 즉위했습니다. 

그리고 이성계가 즉위하자마자 또 사신단이 왔죠.


섬라곡국(暹羅斛國)에서 그 신하 내(乃)【내(乃)는 그 나라 관직 이름이다.】 장사도(張思道) 등 20인을 보내어 소목(蘇木) 1천 근, 속향(束香) 1천 근과 토인(土人) 2명을 바치니, 임금이 두 사람으로 하여금 대궐 문을 지키게 하였다.


섬라곡(暹羅斛)의 사절 장사도(張思道) 등이 돌아와서 말하였다.
“작년 12월에 회례사(回禮使) 배후(裵厚)와 함께 일본에 이르렀다가, 도적에게 겁탈되어 예물과 행장을 다 태워버렸습니다. 다시 배 한 척을 꾸며 주시면 금년 겨울을 기다려서 본국에 돌아가겠습니다.”
그리고 칼과 갑옷과 구리그릇과 흑인 두 사람을 바쳤다. 왕이 정사를 보고 있었는데, 예조에 명령하여 섬라곡 사람을 인도해서 반열(班列)에 나오게 하였다.


섬라곡 사람 장사도(張思道)를 예빈 경(禮賓卿)으로 삼고, 진언상(陳彦祥)을 서운 부정(書雲副正)에 임명하였다.


1393~1394년의 기록입니다.

기록은 심플하지만 더 많은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첫번째로 내라는 관직의 장사도라는 사람이 왔다는 것입니다.

한자는 다르지만 발음은 똑같이 나이로 추정됩니다. 

즉 이번에도 아유타야의 관직을 받은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죠.

하지만 이름은 대놓고 중국인티가 납니다.

그렇지만 물품이나 토인이나 동남아에서 온 것 자체는 맞는 것 같고요.

그러면 이런 추정이 가능하겠죠.

당시 아유타야에는 중국인이 거주하면서 무역활동을 꽤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아유타야왕의 관직을 받아 왕실의 무역단으로 활동하기도 하였고요.

그들이 또 다시 시장개척겸 해서 한국에 온 것입니다.
'
한편 그사이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하자 이제 폼을 낼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 때 듣도 보도 못한 섬라곡국에서 사신이 왔다는 것인 그게 사기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이성계의 권위를 올려 줄 수 있었고요.

여기에 토인까지 바치니 더더욱 폼 납니다.

이러한 토인을 궁궐경비에 쓰면서 가오를 또 잡고요.

이후 답사를 보냅니다만 바로 왜구에 걸립니다-_-;

장사도는 다시 돌아오는데 이번에 또 흑인을 바쳤고요.

이들 흑인이 누군가는 모르겠습니다.

말레이족 노예일 수도 있고, 동남아 선주민인 네그리토 인종 노예일 수도 있고, 진짜 아프리카에서 온 노예일 수도 있죠.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동남아 출신 노예일 가능성이 높을 것입니다.


당시 동남아에서는 수마트라 내륙지방, 자바와 발리 일부, 술라웨시 내륙, 뉴기니 해안가에서 납치한 노예를 여러군데로 팔았습니다.

그들은 거리상 당연히 아유타야까지 갔을 가능성이 높고, 이들을 선원이나 노예로 고용한 것이겠죠.

다만 그 시간동안 동남아까지 가서 흑인노예를 사왔다는 것이 이상하긴 한데.

사과의 의미로 선원으로 쓰던 노예를 바쳤다면 가능한 것이겠죠.

여튼 조선은 다시 야들을 보냅니다. 

...하지만 결과는 비참했습니다.


이자영(李子瑛)이 일본에서 왔다. 당초에 자영(子瑛)이 통사(通事)로서 예빈 소경(禮賓少卿) 배후(裵厚)와 함께 섬라곡국(暹羅斛國)에 회례사(回禮使)로 갔다가, 그 사신 임득장(林得章) 등과 더불어 돌아오다가 전라도 나주(羅州)의 바다 가운데에 이르러 왜구에게 붙잡혀 다 죽고, 자영만이 사로잡혀 일본으로 갔다가 이제 돌아오게 된 것이었다.

섬라곡국(暹羅斛國) 사자(使者) 임득장(林得章) 등 6인이 왜인(倭人)에게 잡혀갔다가 도망하여 왔으므로, 득장(得章) 등 4인에게 각각 옷 1습씩 하사하고 종인(從人)에게도 주었다.

임금이 근정전(勤政殿)에 앉아 조회를 받으니, 항왜(降倭) 나가온(羅可溫)은 조반(朝班) 동8품(東八品) 반두(班頭) 조금 뒤에 서열(序列)하고, 섬라곡국(暹羅斛國) 사람은 서8품(西八品) 반두 조금 뒤에 서열하였다. 나가온에게 단자(段子) 옷 1습(襲)과 세포(細布) 옷 1습과 사모(紗帽)·은대(銀帶)·목화[靴]를 하사하고, 그 당류 12인에게도 각각 베옷 1습씩을 하사하였다.


...왜구의 레이드 절 to the 망.

겨우 살아 돌아왔습니다.

이 때가 1396~1397년.

살아돌아온 일부는 다시 폼잡는데 씁니다.

이후 태국의 기록은 끊깁니다. 

딱 하나 나오긴 해요.

별 의미 없는 기록이긴 하지만요-_-;;


1. 전하께서 즉위(卽位)하신 이래 문(文)을 높이고 무(武)를 숭상하여, 선비는 힘쓰고 군사는 강하여 그 위엄(威嚴)이 인적(隣敵)에게 가해져서, 유구(琉球)·섬라(暹羅)·왜국(倭國)의 사람이 내부(來附)하지 않음이 없으니, 진실로 천재(千載)에 드문 일입니다. 그러나, 왜노(倭奴)란 것은 성품이 사납고 심정이 악하여 대대로 도둑질을 행하니 백성들의 원수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 백성들과 더불어 주군(州郡)에 섞여 살며 관직(官職)까지 받아서 대궐 뜰에 숙위(宿衛)하고 있으니, 심히 온당치 못합니다. 진(晉)나라 초년(初年)에 여러 오랑캐[胡]가 중국에 섞여 살고 있었는데, 곽흠(郭欽)과 강통(江統)이 모두 무제(武帝)에게 ‘변방 밖으로 몰아내어 난(亂)의 계제(階梯)를 끊으라.’고 권하였으나, 무제가 듣지 않았다가, 20여 년 뒤에 이(伊)·락(洛)1590) 의 사이가 마침내 오랑캐 지역이 되었고, 당(唐)나라 초년(初年)에 돌궐(突厥)이 그 부락(部落)을 잃고 모두 장안(長安)에 이르니, 위징(魏徵)이 태종(太宗)에게 권하기를, ‘차마 다 죽일 수는 없으니 마땅히 고토(故土)로 돌려보내고, 중국에 머물러 둘 것이 아니라.’ 하였으나, 태종이 듣지 않았다가, 드디어 당나라 왕실로 하여금 대대로 융적(戎狄)의 난(亂)이 있게 하였으니, 이것은 지난 일의 밝은 거울입니다. 신 등은 두렵건대, 혹시 내란(內亂)이 있으면 이들 무리가 마침내 외환(外患)이 될까 염려되오니,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고금(古今)을 참작하여 재탁(裁度)해 시행하소서.”


..딱 폼으로 섬라에서도 사신이 왔다는 1409년의 기록입니다-_-;

하지만 이외의 기록이 끊기는 것으로 봐서는.

다시 아유타야로 빠꾸한 사람들이 조선으로 돌아온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 이유는 당연히 왜구 때문이겠죠. 

왜구 레이드를 이따구로 당하면 목숨이 위험해서라도 가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결정을 내렸을 듯 합니다.

이렇게 여말선초의 태국과 한국의 접촉은 끝납니다.

이 접촉은 솔까말 사기성이 농후하지만 상황을 고려하면 염탕질+가오내기가 겹친 합작품이었고.

서로의 이익이 맞아떨어지면 유구처럼 나름 오랬동안 교류를 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문제는 왜구였죠.

왜구가 끊길려면 1418년의 대마도 정벌까지 기다려야 했습니다.

하지만 하필이면 아유타야의 사신(?)은 왜구가 들끓을 때에 왔고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시츄에이션을 겪었죠.

그 결과 여기는 무역이고 뭐고 일단 위험해서 못가겠다는 결론을 내렸을 것이 분명합니다.

...고로 이후에 접촉은 끊깁니다. 

나름 아쉬운 점이 많은 슷호리죠. 


그래도 개인적으로 하나 상상하는 것은 있습니다.

태조 이성계 때부터 궁궐 경비를 흑횽이 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

그들이 오리지날 흑횽일지, 동남아 원주민인 네그리토일지, 아님 걍 남방계 몽골리안인지는 모르겠지만.

조선인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가진 사람들이 조선 궁궐의 경비를 맡았다는 것.

나름 상상을 해보면 재밌지 않겠습니까?

덧글

  • 로자노프 2011/09/25 16:15 # 답글

    결국 웬수는 왜구..... 하기사 동양의 바다에서 깽판 치는게 거의 다 왜구이긴했습니다만
  • 앨런비 2011/09/25 17:10 #

    뭐 그렇다능.;
  • MessageOnly 2011/09/25 16:21 # 답글

    조선에서는 오귀자가 홍모귀보다 선임이군요.
    홍모귀들이 전입하기 전에 다 죽었겠지만...;
  • 앨런비 2011/09/25 17:11 #

    홍모귀가 원나라때 들어왔을 수도 'ㅅ'
  • 리리안 2011/09/25 22:12 # 답글

    어쩐지 교과서에서 조선 초에 통교했다던 태국, 자바가 그 이후론 흔적이 없던 이유가 있었군요...그놈의 외구들
  • 앨런비 2011/09/25 22:59 #

    하필이면 왜구가 남아있을 때 온 애들에게 묵념-_-;
  • 지나가던과객 2011/09/25 22:22 # 삭제 답글

    만일 왜구가 없었더라면, 조선의 역사가 좀 달라지지 않았을까요?
    그런 생각이 드네요.
  • 앨런비 2011/09/25 22:59 #

    활은 만들기 쉬웠을 수도요.;
  • DeathKira 2011/09/25 22:34 # 답글

    왜구 러시의 비극.. 몇년만 늦게 만났더라면 또 모르겠는데 말이죠.
    뭐, 왜구 토벌 후에 조선에서 보냈다면 또 모르겠지만 고려에 비해 폐쇄적인 국가였단 점도 한 몫한 거 같군요.
  • 앨런비 2011/09/25 22:59 #

    일단 항로를 몰라서 갸들 배에 태워 보냈는데 조선에서 능동적으로 하기가 힘들죠.
  • DeathKira 2011/09/25 23:12 #

    제 의도는 명의 정화 원정과 같은 개척선의 파견이 없었다는 점입니다.
    고려가 개척선을 보냈다는 건 본 적이 없지만, 그래도 고려는 조선에 대비하여 대외무역이 활발한 나라였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이것은 좀 안타깝기도 하네요.
  • 앨런비 2011/09/25 23:14 #

    그건 확실히 아쉽긴 하군요. 조선이 무역을 너무 하지 않은 것을 부인할 수는 없지요.
  • 누군가의친구 2011/09/26 02:22 # 답글

    하긴 그당시 왜구의 활동과 고려-조선의 대응을 보면 눈물나니까 말입니다. 국방부 전사편찬 위원회에서 발행하는 『軍史』라는 정기 간행 서적이던가 거기서 읽었던 내용으로는 고려조정이 왜구 대책때문에 엄청 애먹더란 말이죠. 조정의 대응방안에 대한 찬반 양론끝에 왜구에 대응하기 위한 정규군이 창설되었는데 얼마 안되서 크게 당하질 않나...(사실 그게 옳은 대응책이긴 했는데 초반부터 그모양이다보니 조정의 반응이 좋지 않았다던가...) 하지만 그 고려말기의 대응때문에 그나마 조선초에 좀 나아진 편이라는 평도 있었...
  • 원양항해 2019/04/23 18:54 # 삭제 답글

    당시 왜구들 항해술이 꽤 좋았던 것 같네요. 저런 국제 항로를 털고 다녔으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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